대범이네

간만에 맛 좀 봤다옹

오온이 2014. 8. 11. 20:38

 

무슨 맛?

내가 주는 거 먹는 고양이 보는 맛!

 

 

 

칼퇴 중이었다.

늘장 옆으로 지나가는데 눈에 띄는 분이 계셨으니,

"그루밍 중이시다옹~"

 

한 눈에도 병든 것 아닌가 싶은, 마르고 깨끗하지 않은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.

내가 멈춰 서서 저를 보며 말을 걸자 흘낏 보더니 하던 그루밍을 계속 한다.

 

이 더운데 피부병까지 있는 굶은 고양이, 라는 생각이 드는데

내가 괭이들에게 하는 건 겨우 뭐라도 좀 먹이는 것뿐...

 

급히 조달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 먹는 참치(짜겠지만 ㅠㅠ)를 사왔다.

'아, 물도 한 병 살 걸! 아, 사무실에 테이크아웃 컵 씻어둔 거 있는데!' 이런 생각도 하면서,

혹시나 어디로 가버리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하면서...

 

돌아오니 없다.

그래서 골목으로 살살 들어가 냐옹아~했더니

"뭐야, 아직 집에 안 갔나?"

 

약간 경계하는 듯도 하고, 그렇다고 딱히 도망가지는 않는 녀석.

그런데 녀석이 앉은 곳 앞에 어쩌면 고양이를 챙기는 듯한 흔적이 있다.

 

이끼 끼었지만 물통 하나와(며칠 전 내 방의 브리타 정수기 수조에도 이끼가 끼어 몹시 당황했는데 얘 물통도...ㅠㅠ)

(옆 참치 캔은 내가 임시로 놓은 것)

비록 비어있지만 일회용 접시도 하나 있다.

어쩌면 생선 뼈 같은 거라도 있었을지...

 

 

 

 

그렇다고 남의 집 빈 그릇에 덜컥 참치를 까 놓긴 뭐시기하고

캔 째로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

그나마 동네 눈치 조금 덜 보일 것 같은 종이타월을 깔고 캔을 엎었다.

 

엎자마자 바로 내려와서 먹었다. 정말 1초도 걸리지 않고.

 

 

 

 

 

 

그럼 편히 드시오, 나는 캔을 버리고 가리다, 하며 쓰레기 버리고 오다 보니

한 녀석이 더 와서 같이 먹고 있었다. 

 

 

 

 

 

똑같은 무늬인 것이 혈연관계일 것 같다.

 

내가 쳐다보니 도망가려던, 나중에 온 녀석.

야, 나 가니까 편하게 먹어.

 

 

......

지금도 가방에 사람 먹는 참치 캔이 들어있긴 한데

아무래도 다시 (싸구려) 고양이 캔을 갖고 다녀야 할 것 같다.

 

오랜만에 길고양이들이 내가 준 뭔가를 먹는 걸 봤다.

고양이들에겐 사람 먹는 음식 또 먹은 오후였겠지만

나에겐 가벼운 동정심이라도 쓸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.

 

 

그러나, 저곳마저 바로 몇 미터 옆처럼 좀 있어보이는 아파트를 지어댄다면,

쟤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게 될까...

무사히 길을 건너 산으로 가면 좋겠지만...

 

나는 낡은 동네가 오래 있으면 좋겠다.

이끼 낀 물통이거나 뭐거나 있고

고양이들이 마음 편히 앉아있을 수도 있고,

못사는 사람들도 멋진 새 아파트단지에 집을 내주고 나가지 않고 그냥 살 수 있도록...